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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25, 2014

[Monologue] 10-1



일기


오전 일찍 일어나 가족과 아침 식사를 했다. 
얼마 만에 4명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인지 까마득했다. 게다가 아침을 먹는 것 자체가 실로 오랜만이다. 
아침으로 먹는 밥의 양이 꽤 많다. 분명히 공기에 밥을 푼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먹길 원하는 아빠일 것이다. 
눈곱이 잔뜩 낀 채로 간신히 눈을 뜨곤 좋아하던 오리고기도 마다하고 먹는 둥 마는 둥 꾸역꾸역 먹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향했다.
어젯밤 제대로 잠자지 못해 엄마와 작당하곤 동생을 조수석에 억지로 태운 뒤 신 나게 잠에 빠졌으나 엄마는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몸이 아파 처방 약을 먹었는데 약이 엄마의 체력보다 센 탓에 전날 밤에도 밤을 지새웠다는데 걱정이 된다. 

10월 중순이라 공기가 차갑다. 폴라티셔츠에 재킷까지 입었는데도 몸이 잔뜩 웅크려질 정도로 춥다. 아마 내가 서 있는 곳이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이라 더 추운 것 같다. 몸도 마음도. 1309호에 할아버지가 누워 계신다.
죽음이란 내 곁에 존재하지 않은 아주 먼 단어라고 생각했다.
세월은 나를 중심으로만 돌아갔으니 주변인의 시간 흐름을 깨닫지 못했으나 문득 돌아보니 그토록 나를 사랑했던 외할아버지의 흰머리와 주름살, 앙상하게 마른 몸이 이제서야 보인다. 그리고 죽음 앞에 외롭게 서 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께 “손녀 누가 왔을까?”라고 물었을 때 할아버진 눈을 감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미 보미…”
앞을 제대로 보진 못해도 희미하게 우리 모두를 지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며칠 뒤 새벽 두 시,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누구의 휴대폰인지 알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을 땐 엄마가 허겁지겁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할아버지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모부의 전화라고 했다.
부모님끼리만 다녀오겠다는 걸 만류하고 온 가족이 일산으로 향했다. 

정말 사랑하는 나의 영웅 나의 할아버지.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마르고 병약한 모습만이 남아있다.
우리를 기다리신 듯 거칠게 호흡하면서도 조금씩 평안이 찾아온다.
우리 모두 눈물을 꾹 참으며 할아버지께 다가가 “다미가 왔어요. 할아버지 사랑해요”라고 속삭였다. 의식이 없는 듯 보였으나 큰 딸인 엄마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할아버지께선 눈물을 주룩 흘리셨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알기라도 하듯 가장 멀리 사는 우리 가족의 얼굴을 보고 싶어 새벽까지 기다렸다 보셨고 잠시 집으로 다녀온 사이 10월 22일 수요일 오전 7시경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 가족과 다른 가족이 자릴 비우고 할머니와 셋째 이모 내외가 새벽 내내 돌본 뒤 외삼촌이 교대한 10분 만에 임종을 맞았다.
할아버진 온 가족을 전부 보셨고 하나뿐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주 편히 눈을 감으셨단다. 그간 괴로웠던 병마도 잊고 거친 호흡을 하지도 않은 편안한 죽음이었다.

3일 내내 있을 짐을 챙기고 오전 10시 정도 할아버지께서 누워 계신 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아빠의 자동차를 주차하는 곳이 부근이라 오다가다 지나쳐야 했던 그 건물에 할아버진 누워 계신다.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아 병원으로 오는 내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으나 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사진을 보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30년 동안의 할아버지와의 소중했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10명의 손주 가운데 첫 손녀로 태어나 유난히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았다.
동생과 한 살 터울이라 두 명의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 엄마가 산후조리할 몇 달 동안 할아버지 댁이 있었던 순창에서 자랐다. 난 얌전한 듯 뒤에서 사고를 치고 다녔던 아이로 집안의 값 비싼 물건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그때 물건을 모두 갚아야 한다고 농담하곤 하셨는데 이젠 갚을 도리가 없으니 애통했다.
첫 손녀의 결혼도 증손자 한 명도 보지 못한 체 눈을 감으셔서 할아버지의 작은 소망 하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슬픔이 깊다.
살아 계실 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할걸. 
더 많이 할걸…

보내 드린 지 얼마 안 된 지금 사무치게 할아버지가 그립다. 
천국에선 몸이 아팠던 모든 걸 잊고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을 보며 늘 평안히 계셔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Monday, August 18, 2014

[MONOLOGUE] 8-1



12층에서 바라보니 발 디딜 틈 없이 건물로 빽빽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8월의 밤은 어느 가을의 오후만큼 춥지 않지만 차가운 바람이다.
저 멀리 보이던 산이 경계선이 흐려지더니 이내 어둠에 자취를 감추었고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보는 것은 썩 나쁘진 않은 기분이었다.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자정이 되기 전까지 이 모든 순간이 유지될 것이다. 그리곤 바람이 지나간 갈대숲처럼 고개를 떨구어 버리겠지. 


모든 슬픔이 복합적으로 다가와 마음의 갈등으로 한참 방황하던 고등학생 때 동네 꼭대기 언덕에 가는 걸 좋아했다.
아니.
지금 생각하니 좋아하던 게 아니라 푸념을 늘어놓기 위한 적절한 공간이었을 뿐이다.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엔 누가 놓았는지 모를 벤치 하나가 있었고 밤이 되면 사람 한 명 다니는 게 드문 그곳에 앉아 한 시간을 흘려보내곤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가락 두 개로 저 멀리 동네를 둘러싼 산을 넘는 시늉을 했고 스물이 넘으면 이곳을 떠나겠다 다짐했는데 보기 좋게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난 이곳에 있다. 

십 년이 더 지나면 어느 곳 야경을 보며 이런저런 일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야경을 바라볼 때마다 아주 쓸모없는 상념이 드는데 이곳 12층에서도 여전히 머릿속을 흔든다.




주절주절








Saturday, May 03, 2014

[MONOLOGUE] 5-1



오랜만에 밀린 책이나 읽을까 하다 눈에 보이는 책을 대충 골라 집었다. 
음식 먹는 걸 즐기지도,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한창 음식 책(키친 에세이, 음식 소설 등)에 빠져 틈나는 대로 사 모았던 적이 있다. 이 책도 그중 하나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바나나 키친'. 
101개의 짧은 에피소드를 다루는데 읽을 때마다 그녀가 묘사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책 속의 음식은 만들어 먹기 어렵고 한국에선 파는 가게도 많지 않다. 고른 건 나름 유명한 빵집의 '야채(채소) 크로켓' 이었으니 하나 남은 걸 사곤 신 나게 포장을 뜯었다. 한 입 베어 물곤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저녁 무렵이라 튀김옷은 눅눅하고 속은 축축해 바나나가 묘사한 크로켓과는 전혀 달랐던 거다. 지금 당장 먹고 싶었던 음식에 실망하는 것보다 때론 먹지 않고 읽는 편이 낫겠다 싶네. 

며칠 전부터 커피가 그토록 마시고 싶더니 결국 카페를 찾았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도 햇살이 좋아 야외에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시려 했지만 고시촌과 대학가가 부근인데 뭘 바라겠나. (그렇다고 그리 고급스러운 커피 문화에 익숙하진 않지만) 그럴 바엔 비교적 한산한 곳을 찾으려 동네 조그만 카페를 들쑤시고 다녔는데 이상하게 한 곳도 자리가 마땅치 않다. 애써 집 밖을 나섰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체인점이라도 들어갔다. 
문득 지금은 스웨덴에 있는 친구가 아메리카노 대신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라는 얘기가 생각나 주문하려던 찰나 이곳에선 마시고 싶지 않아 원래 마시려던 걸 시켰다. 
아무렴 처음 접하는 건 최적의 기분에 적합한 곳이어야 하지… 


Sunday, March 09, 2014

[MONOLOGUE] 3-1




모처럼 한가롭게 쉬는 날을 맞아 뭘 할까 궁리하다 문득 이런 생각조차 쓸데없는 소비라는 걸 느꼈다.30년을 살며 맘 편히 쉬어 본 적이 며칠이나 될까. 조용한 어느 휴일, 동생은 내게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서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집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게… 오전 열 시 이후에 일어나는 건 뭔가 인생을 낭비한다는 기분이 들어. 밀린 책을 읽거나 쌓아둔 자료를 스크랩하거나 하다못해 노트북 안에 영화를 보면 좋잖아. 일찍 일어났으니 오후에 다른 일정을 잡을 수도 있고."

그럴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조용히 변명하는데 동생에겐 그 말이 썩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표정은 뭔가에 쫓기는 듯 피곤해 보여. 쉬는 날인데 오전부터 오후, 저녁까지 일정을 짜 둘 필요는 없잖아. 이도 저도 아닐 바엔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거나 잠을 좀 더 자. 오히려 그편이 더 나아."

그렇다.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한심하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살았다. 30대가 된 지금 몸에 축적되었던 쌓인 피로가 확연히 드러난다. 바쁘게 살았다고 알아주지 않는데 자신을 돌봐야 할 때 다그치고 말았다. 물론 어떤 점에서야 장점은 있겠지만 썩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이다. 정말로.

한 달 전, 태희 언니 집에 갔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집과 작업실에 가면 가장 먼저 책장에 꽂힌 책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곤 한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책을 보면 취향을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언니의 취향에 관해 모르는 건 아니다.) 언니 책장에 꽂힌 책은 뭔가 '여유'라는 단어의 적합한 게 대부분이다. 
언니는 자신의 성향에 맞는 책을 고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책으로 점점 변화되는 것일까? 뭐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무심코 책 하나를 꺼내 책 표지를 들여다보았는데 빌려줄 테니 읽어 보란다. 토막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인데 단숨에 읽을 요량은 아니었으므로 이제껏 몇 편 정도만 봤다. 
책 제목은 '주말엔 숲으로'라는 마스다 미리의 책. 알다시피 꽤 유명한 만화책이다. 한 일화를 읽다 격하게 공감하는 대사가 있어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돌아온 대답은 얻는 것과 느끼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 본질적인 부분이라 배우기보다 느끼는 게 중요하겠지. 그래. 이 글을 쓴 이유도 바로 이 한 문장 때문이다.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다.


Sunday, February 02, 2014

[MONOLOGUE] 2-1



마감 후 며칠 동안 쉬는 것에 기쁨을 맛보는 것도 잠시- 설 연휴를 맞아 전라북도 김제까지 다녀와야 했다. 서울 사는 나로선 평생을 오고 갔지만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게 차 안에서 오래 버티는 것과 시골집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 시골은 말 그대로 '깡촌'이라 주변은 온통 산과 논, 밭이고 가로등이 변변치 않아 저녁 일곱 시만 되면 어디에도 못 간다. 차라리 새벽녘 서울이 더 환할 정도이니 할말 다했다. 텔레비전도 잘 나오지 않고 인터넷이란 없다. 물론 조그마한 구멍가게도 없어서 시골집 가기 전엔 군것질거리를 포함하여 모든 장을 봐두어야 한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만 있어야 하니 책을 가져가거나 노트북에 영화를 넣어 두는 건 무척 익숙한 일이다.

그럼에도 신 나고 좋은 건 짐을 꾸리는 과정이다. 예민한 피부 탓에 물갈이 걱정으로 전용 비누까지 챙겨야 하고 여행용 화장품의 유통기한을 의심하여 집에서 쓰는 기초 화장품까지 가방이 꽉 찬다. 게다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은 가방에 넣어야 직성에 풀리는 성격이라 단 며칠을 묶더라도 장기간 여행하는 기분이다. 

재작년 늦은 가을에 일주일 동안 파리를 간 적이 있다. 몇 시간 전까지 마감에 시달리다 한숨 못 자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야 했기에 하마터면 공항에 늦게 도착할 뻔했다. 하지만 한 달 전부터 만들어 둔 '파리 노트(2013년 8월 포스팅 참고)'에 하루마다 입을 옷을 그림 그리고 글도 써두어 멘붕을 겪진 않았다. 심지어 경유하는 홍콩에서나 기내 안에서 갈아입을 것까지 적어 두었으니 꼼꼼하다 못해 예민할 정도다. 

짐을 꾸리는 것도 나름대로 방식이 있다. 먼저 울퉁불퉁한 바닥엔 진공팩에 각각 넣은 신발 두세 켤레로 판판하게 만든 뒤 두꺼운 옷 몇 벌을 돌돌 말아 빈틈없이 차곡차곡 넣는다. 20인치가 넘는 캐리어는 비행기로 부쳐야 하기에 깨지기 쉬운 물건은 얇은 옷으로 겹겹이 싼 뒤 중간에 넣고 가장 위쪽은 비교적 꺼내기 쉬운 물건을 올려 둔다. 그물 칸막이가 쳐진 캐리어 뚜껑을 채우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노트 덕분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캐리어가 터질 정도로 물건이 많아지는 거다. 여행을 목적으로 다녀오다 보니 하나둘 사모은 물건이 가져온 짐보다 많아졌다. 게다가 용량 제한이 엄격한 파리 공항에서 낯선 외국인이 내 짐을 푸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하나 발만 동동 구르며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으로 가기 하루 전날 가져온 옷 몇 벌을 버렸다. 파리에 버리고 온 내 물건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쓰레기 처리장으로 갔을까? 아니면 훗날 빈티지 제품이랍시고 물 건너 한국 구제가게에서 팔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Sunday, December 08, 2013

[MONOLOGUE] 12-1





오랜만에 동네 카페에 왔다. 마감 때를 제외하곤 거의 올 일이 없는데 모처럼 쉬는 날에 누구도 만나지 않고 내 시간을 갖기로 했다. 카페에 나서기 전 노트북을 챙긴 뒤 책을 읽고 싶어서 책장 가득 꽂혀 있는 서적을 봤다. 읽을 책은 참 많은데 오늘따라 더럽게 읽고 싶은 책이 없다. 그래서 오후 내내 동네에 있는 서점과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평소였다면 사고 싶은 책이 한두 권쯤은 있는데 오늘은 빈손이다. 정말 이상한 날이다.


오늘 새벽, 문득 좋아하는 영화관인 아트나인 상영 표를 봤다. 요즘 옛날 영화를 재개봉하는 일이 잦아 기분이 좋다. 특히 보고 싶었던, 그래서 DVD까지 샀던 화양연화를 상영한다. 물론 DVD는 꺼내보지 않고 먼지만 쌓였지만 말이다. 왕가위 감독의 삼색로맨스라는 주제로 화양연화와 중경삼림 그리고 동사서독 리덕스까지 극장에서 볼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영화 소개가 아니므로. 옛날 옛적 그때가 중학생 때였나. 한창 영화나 책에 좋은 글귀를 찾아 모으던 때가 있었다. 그땐 쥐뿔도 모르면서 사랑과 이별에 대한 글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그 중에 중경삼림 대사도 있었다. 화양연화 대신 중경삼림 영화표를 끊었다.

관객은 나 포함해서 6명 정도.


극장 밖으로 나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서점 두 바퀴쯤 돌았다. 4천 곡쯤 들어있는 아이팟은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고 요즘 멜론으로 음악 듣는 일이 드물게 됐다. 그럼? 예전에 받은 어플을 이제야 유용하게 쓴다. 장르별로 들을 수 있고 앨범 재킷이 아닌 곡과 관련된 뮤직비디오나 영상도 볼 수 있다. 듣던 노래만 지겹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나름 귀가 즐겁다.


늦잠을 잔 탓에 허겁지겁 준비하느라 극장으로 가는 길은 참 더웠다. 게다가 잠 깨려고 커피까지 사야 했으니 시간은 정말 촉박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한결 여유로워 오히려 추웠다. 극장에서 집까지 걸어가려면 10~15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헌책방 들리느라 정류장을 조금 지나쳤더니 다시 되돌아가기 싫어서 그냥 걷기로 했다. 그제야 무심코 흘려버린 계절의 변화가 시각적으로 다가온다. 전까진 덥고, 춥고를 몸으로만 느꼈다. 가로수 잎이 바람에 뒤엉킨다. 말라 비틀어지고 푸석푸석하니 수분 하나 없다. 요 몇 달 떨어진 낙엽 줍는 재미로 살았는데 이젠 아이러니하게 밟는 재미가 들렸다. 모양새는 괴기스럽지만 우자작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좋다.


동네엔 아주 큰 수족관이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면 늘 수족관 밖에서 바글바글한 물고기를 보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어릴 때 집에 어항이 있었다. 지금 물비린내를 참을 수 있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 같다. 주기적으로 아빠는 어항을 청소했고 그때마다 도왔다. 금붕어를 키우다, 열대어를 키우다, 마지막으로 민물고기를 키웠다.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어항을 또르르 거리며 놀다가 금세 질려서 일어났다. 아무리 손가락을 놀려도 우리집 물고기처럼 그런 반응이 없다. 혼자 애정 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건 없다.


책장에 꽂힌 책 중에 아주 구석에 자리 잡은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눈에 띈다. 이 책은 약 4분의 1 정도만 읽고 덮었는데 그 이유는 한자가 많아서였다. 1982년도 책이니 그럴만했다. 그래도 읽을까 싶어서 가방에 넣었지만, 이 글을 쓰기 전 약 5페이지 정도 읽다가 다시 그만두었다. 책을 다 읽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한가지는 개정판을 사서 읽거나 아니면 한문 공부를 해야 하는 거다. 둘 다 고민된다. 


곧이어 커피를 가져가라는 진동벨이 울렸다. 쿠폰 10개를 다 채웠으니 공짜 커피다. 오늘만 뜨거운 커피 두 잔째다. 직원이 쿠폰 제도를 없앴다고 말한다. 마지막 쿠폰 종이다. 커피값이 얼마나 하길래 이렇게 각박하나 싶었는데, 여기에 올 때마다 몇 시간이고 앉아 있으니 커피값보다 자릿값에 가깝다는 걸 새삼 느꼈다.